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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독립을 위해’ 호치민 주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허용재 기자 기사입력  2019/08/17 [13:59]

▲     ©출처: 베한타임즈 제공

올해 8월 15일 광복절은 다른 여느 해보다 특별하다. 최근 한국과 일본의 무역 분쟁으로 인해 한국 내에 반일 감정이 극심해 지고 있는 시기에 맞이하는 이번 광복절은 한국인들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해외 교민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베트남 한인사회에서도 일본 불매운동이 퍼져나가고 있다

한국의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같은 식민지 국가라는 공통분모가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두 나라가 교류를 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 2018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프랑스 정부자료가 공개되면서 한국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치민 전 주석이 독립에 대한 교감을 나눈 사실이 확인됐다.

재불 한국사 연구자 이장규 씨가 프랑스국립해외영토자료관(ANOM)에서 찾아낸 프랑스 정부자료는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파리에서 호치민 주석의 행적을 밀착 감시하던 프랑스 정보경찰 장(Jean)이라는 인물이 작성했다. 베트남과 한국이 독립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연대했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담겨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파란 선 안에 "응웬아이꾸옥(호치민 주석)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고 적었다. 또한 "호치민이 하려는 것에 대비하려면 미국에서 한국인들이 펴낸 간행물들을 살펴봐야 한다. 파리의 한국인들도 간행물을 창간하려는 것 같다"고 기술했다.[파리 7대 박사과정 이장규씨 제공/프랑스국립해외영토자료관 소장자료] ©출처:  베한타임즈 제공

호치민 주석,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영어로 대화

20대의 호치민 주석은 1919년 베트남을 식민지배 하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베트남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응웬아이꾸옥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는데, 베트남어로 ‘애국(愛國)’이라는 의미였다. 1차대전이 끝나고 세계 평화회의가 열리던 파리에는 호치민 주석 외에도 여러 식민지국가에서 건너온 독립투사들이 많았다.

프랑스 경찰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호치민 주석은 한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소속의 김규식(1881~1850)을 비롯해 황기환(?~1923), 조소앙(1887~1958), 윤해(1888~?) 등과 교류해 왔다. 또한 자료는 ‘호치민 주석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계획 등을 근거로 삼고 있다’고 기록했다.

호치민 주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의 친분을 보여주는 일화도 자료에 남아있다.

▲    프랑스 신문에 실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대표단 좌로부터 황기환, 윤해, 고창일  ©출처: 베한타임즈 제공

‘한국인 황씨는 호치민과 아주 친밀한 분위기에서 영어로 대화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언급된 황씨는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이다. 심지어 호치민 주석은 자신을 감시하는 프랑스 경찰 '장'을 황기환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다.

기록에는 ‘호치민은 나를 한국인 대표부 서기장인 황에게 소개해줬다. 우리는 러시아·스웨덴을 거쳐 프랑스에 온 한 한국인(윤해로 추정)과 대화했는데 이 사람은 영어도 불어도 잘하지 못해서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고 쓰여있다.

호치민 주석과 한국 임시정부의 협조

1920년 1월 8일 저녁 생제르맹가(街) 모처에서 파리의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프랑스 지리학회 모임이 열렸다. 황기환은 이날 '극동에서 위협받는 평화'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의 국회의원, 교수, 중국인, 베트남인, 심지어 일본인까지 참석한 이 자리에서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황기환과 함께 학회에 참석한 호치민 주석은 연설을 거부당했다. "베트남 인구도 한국과 비슷하다. 간단히 할 테니 연설을 허락해달라"고 했지만, 학회장이었던 소르본대 교수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경찰 ‘장’은 "호치민은 파리의 한국 대표단의 협조를 부탁했다. 이들은 한국의 자주독립을 요구하고자 파리평화회의 대표로 온 이들로, 1919년 4월 '대한민국 통신국'을 열었다. (한국인들은) 호치민이 통신국을 자유롭게 쓰게 했고, 그의 저작과 홍보물, 한국 학생들이 미국서 출판한 한국평론 등도 파리에 유포됐다"고 기록했다.

▲   프랑스 시절 김규식(좌)과 호치민 주석 ©출처: 베한타임즈 제공

자료에는 호치민 주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직을 맡아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로 참석했고 훗날 임정 부주석까지 지낸 김규식(1881~1850)과의 남다른 인연도 찾아볼 수 있다.

자료 중 1920년 2월 메모에는 "호치민이 프랑스에서 기고한 모든 글이 번역돼 중국에서 간행됐는데, 모두 호치민이 김규식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뿐만 아니라 김규식은 중국 신문의 미국 특파원을 호치민에게 연결해줘 인터뷰를 주선해 줬다.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에는 호치민 주석과 김규식이 서로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친밀했다는 정황이 묘사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의 교류로 인해 호치민 주석은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1919년 프랑스 일간지 르 포퓔레르에 '인도차이나와 한국'이라는 글을 기고해 일본과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비교하기도 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의 저서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에 따르면 중국 윈난성에서 베트남민주동맹(베트민)을 결성한 호치민 주석이 1945년 한국의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까지 와서 환송연을 열었다. 당시 김규식은 임시정부 부주석이었다.

이번 프랑스 정부자료를 통해 한국 사학계는 호치민 주석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긴밀한 관계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수석연구위원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획기적 자료이며, 파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이 다른 식민지 활동가들과 연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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